막 14:53-72절

“53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가장 공정해야할 종교지도자들은 올바른 증거와 증인도 확보하지 않고 예수를 불법으로 체포합니다.
예수를 죽이기로 답을 정해놓고 증거를 찾습니다.
불법과 거짓이 가득한 재판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표적 수사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죄형을 정해놓고 재판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원하십니다.

마가는 재판장에 거짓 증언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증언은 두 사람의 말이 일치해야 효력이 있습니다.
만일 거짓 증언이 밝혀지면 그 사람은 자기가 덮어씌우려 했던 만큼의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16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17 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18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
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19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20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신명기 19:16~20)

실제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입니다.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했습니다(요 2:20-22).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자 대제사장이 나섭니다.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의 침묵은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사53:7)라는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말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신성모독의 죄를 짓도록 묻고 있는 것입니다.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을 아신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밝힙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권능자 하나님 우편에 앉을 정도로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도 밝히십니다.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것까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신성 모독의 말로 들렸습니다.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신성 모독이 입증되면 재판관들은 일어서서 자신들의 옷을 찢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옷을 찢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사형에 정죄되었고 무자비한 모욕이 예수에게 가해졌습니다.

침을 뱉고 때리는 것은 경멸의 표시였습니다. 특히 침을 뱉는 행위는 극심한 경멸의 표시였습니다.

선지자 노릇을 하라는 말은 메시야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이라는 조롱입니다. 예수님이 신성모독죄로 정죄되자 하인들도 손바닥으로 예수님을 쳤습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천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다 쓸어버리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이 왜 아무 대응도 안하시고 모욕을 다 당하셨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 당하심입니다.

죄는 우리가 짓고 고난은 주님이 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붙잡혀가신 예수님이 어떻게 될까 대제사장 관저 아랫뜰에서 기다리다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합니다.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세 번째 질문한 사람은 베드로가 귀를 잘라버렸던 말고의 친족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요 18:26-27)

닭이 두 번 울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울며 회개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심히 통곡하니라’ 했습니다(마 26:75;눅 22:62). 베드로의 울음은 진지한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리도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창피한 일을 범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눈물의 회개입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눈물로 회개하면 주님은 다 용서하시고 형제를 굳게 세우는 자로 다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의 희생양으로 온갖 모욕을 당하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여셨고, 베드로는 세번 부인의 실패를 했으나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는 자로 세워졌습니다.

지금의 고난과 실패에 무너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구원과 회복을 이루실 것입니다.

성경일독 : 왕하 19-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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