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3:22-35절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땅의 70억 인구가운데 구원받고 천국에 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많을까요? 적을까요?

유대교 내에서는 소수의 극악한 죄인을 제외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견해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얻을 수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예수님은 적다고 하십니다.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이란 들어가는 사람이 적음을 말해줍니다.
‘힘쓰라’란 현재형으로 살아 있을 때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주어집니다.

구원의 좁은 문이 닫히면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복음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이 땅에서 살아 있을 때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죽은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가 예수를 압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은 가지처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공급받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구원의 문이 닫힌 후에 그제서야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임을 알고 구원의 문,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해도 구원의 문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우리도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자리에 함께 있었고, 길에서 가르치실 때에 그 자리에 자신들도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예수님과 연결점을 찾으려하나 주님은 단호하십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했다고, 식사에 함께 참석 했다고, 봉사와 선교에 참석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구원얻은 자입니다.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죽은 후에 예수님이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하시면 낭패입니다. 교회 생활, 종교생활, 모태신앙 등이 구원을 보장하주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앎은 단순한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 앎, 체험적 앎, 인격적 앎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구원을 받으셨나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신가요?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나라 천국 잔치에 동서남북 전 세계 각국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나중 된 자는 이방인 가운데 구원얻은 자들을 말하고 먼저 된 자는 유대인 가운데 구원얻은 자를 말합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는 말씀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 예수를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했느냐보다 중요한 것이 예수를 얼마나 깊이 넓이 높이 알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미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계신가요?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며 사는 자가 죽은 후에 천국 전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에게는 많은 위협들이 존재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위협, 헤롯의 위협 등등..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과 가고자 하는 길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위협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상징적 의미로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게 되실 것입니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고 너무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품에 품으시고자 선지자들을 그렇게 보냈건만 그들은 선지자들을 돌로 차고 죽였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황패하게 될 것입니다. AD 70년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폐허간 된 이후 근 2000년간 유대인들은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인생의 비참함을 보여주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재림하기까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은 더욱 거부하고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를 부인하고 거부하던 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을 것이나 그 때는 이미 늦습니다. 늦기 전에 주의 날개 아래 거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인격적인 교재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일독 : 고후 10-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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