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8:10-22절

“10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의 요구는 타당해 보입니다.
사무엘은 늙고 사사로 세운 그의 두 아들은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은 것은 사사의 세습이라기 보다 보조 사사로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버지와 다른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의 이름은 요엘과 야비야입니다.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란 뜻이고,
아비야는 ‘여호와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사무엘이 신앙적인 이름을 지어주며 두 아들이 여호와 한 분만을 참 하나님으로, 아버지로 삼고 바른 신앙 안에서 자라기를 바랬는데 두 아들은 그들의 이름과는 달리 돈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훌륭한 신앙의 아버지를 두었다고 해서 자식들이 자동적으로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이 신앙적이라고 자동적으로 신앙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바른 신앙은 ‘사랑하며 소원하며 닮아가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소원하며 하나님을 닮아가려는 마음이 있을 때 바른 신앙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했던 사무엘은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도 나름대로 애를 썼을 것입니다. 문제는 두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모든 신앙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신앙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부모가 본을 보여도 자식이 따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자녀가 신실한 신앙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부모에게 큰 축복입니다.

나와 자녀의 신앙은 어떠한 것 같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자 사무엘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왕의 제도를 백성에게 가르쳐 줍니다.

“11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12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13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14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16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17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권리에 책임이 따르듯이 요구에도 대가가 따릅니다.
나는 아무런 책임을 다하지 않고 왕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며 자신들의 삶를 윤택하게 해주겠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왕의 제도를 운영하려면 자신들의 자녀도 희생하고 가장 좋은 소산도 드려야 하고 추가적인 십일조도 드려야 하고 자신의 노비와 가축도 제공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이방 나라들이 강력한 왕이 통치하는 모습이 좋아보여 주변 나라들처럼 되고 싶어서 왕을 요구했지 구체적으로 자신들이 헌신해야할 부분이 있음은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을 하나님을 버린 행위로 보셨습니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삼상8:7-9)

이스라엘 왕정 제도는 이미 모세에 의해 예언된 바 있습니다(신 17: 14). 왕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악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실 것을 기다리지 않은 것이 잘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본주의적 욕구를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법대로 왕을 세우고자 했기에 잘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의 요구를 왕되신 하나님을 버린 행위로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주변 흐름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하나님보다 앞서 나갈 때 하나님은 걸음을 멈추십니다.

하나님보다 앞서가면 혼자 가야 합니다.

“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은 존중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나요? 아니면 앞서 가고 계신가요?

하나님을 앞세우며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야 할 건강한 반응은 “돌이켜 보니 왕을 요구하는 것은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는 것과 같네요”라고 회개함이 맞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택한 왕으로 인하여 그들이 고통받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했는데도 그들은 왕을 요구하는 것을 굽히지 않고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합니다.

성도는 거룩에 고집 부려야지 자신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면 안됩니다.

귀를 닫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왕을 허락하십니다.

“21 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
22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그들의 요구대로 세워진 왕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우선 순위에 두고 사는 왕이 아니라 백성들의 눈치를 살피고, 사람들의 명성을 중시하는 왕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을 닮은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닮은 왕을 그들에게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요구할 때,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진 것은 축복이 됩니다.

우리가 고집을 부리며 요구할 때,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을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나의 요구는 바른가요?

고집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길 바랍니다.

성경일독 : 삼상 14-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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