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3:19-39절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고초는 괴로움과 어려움을 말합니다.
재난은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을 말합니다.

유다의 멸망은 예레미야에게
쑥과 담즙처럼 쓰디쓴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마음이 그것을 기억할 때마다 낙심이 되었습니다.

저마다 고통의 지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고통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같습니다.

이 때 낙심에 계속 머무르면 안됩니다.

낙심의 상황을 다시 돌이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낙심을 소망으로 바꿔야 합니다.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라는 말은
낙심되는 상황을 계속 마음에 담아 두었다는 뜻이 아니라 낙심의 상황을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낙심의 상황이 오히려 소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낙심의 상황이 소망으로 바뀐 것일까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때문입니다.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낙심의 상황에서 성도가 기억할 것은 무궁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진멸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낙심의 상황에서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매일 새로운 소망의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이 무긍하신 분인데 성실하시기 까지 하십니다. 즉 사랑과 긍휼을 반드시 시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매일 소망의 새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매일 소망의 새 아침을 맞이하고 계신가요?

매일 소망의 새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라는 말은
‘여호와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니’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내가 가진 전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낙심 중에 바랄 것은 오직 여호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기 심령에 이 사실을 고백하며
하나님만 바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낙심이 될 때, 내 심령에 다음과 같이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다. 나의 전부이시다.
나는 주만 바라리라!”

주를 바라는 사람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주를 구하고 기다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시나요?

내가 생각한 기다림의 지점을 넘어서면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정말 선하게 응답하실까?
계속 기다리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이 때 더욱 잠잠해야 합니다.
입을 땅의 티끌에 대야 합니다.

“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혼자 앉아서 잠잠히 생각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이 멍에를 메우셨음을 알게 됩니다.
멍에를 매우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입을 땅의 티끌에 대라는 것은 겸손한 침묵과
절대적 복종을 의미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소망을 주십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때로 고통스럽습니다.
치욕이 따르기도 합니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치욕을 배부를 정도로 견디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선하게 응답하십니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우리로 고생하게 하시고 근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닙니다.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34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35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36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34-36절은 멸망 전 남 유다가 범한 죄악입니다.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은 주의 명령입니다.

“37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모든 화와 복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죄에 따른 벌은 누구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38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기다림의 지점을 넘어설 때 입술을 땅에 대고
나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치욕과 고생을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다림의 지점을 넘어설 때 어떻게 하고 계시나요?

입술을 땅에 대고 겸손히 하나님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경일독 : 창세기 16-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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